[Special Report | 글로벌 벤치마킹 ⑩] 필립 여는 어떻게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을 싱가포르로 불러들였는가

서영현 기자 / 기사승인 : 2026-11-06 10:3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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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대 초 자원과 국토 부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바이오메디컬을 국가 생존전략으로 선택한 싱가포르는 '건물'이 아닌 '세계적 과학자와 산업 생태계'를 키우는 데 집중했다. 국가가 선제적으로 위험을 부담하고 연구와 산업, 인재를 단 하나의 공간으로 연결해 아시아 바이오 혁신의 중심으로 거듭난 싱가포르의 사례는 단기 성과에 집착하는 글로벌 바이오 정책에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사진=챗GPT)

 

 

바이오 강국은 연구소 건물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연구자와 장기적인 국가 전략, 그리고 산업으로 연결되는 연구 생태계가 싱가포르를 아시아 바이오 혁신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2000년은 세계 바이오산업의 흐름이 바뀌기 시작한 시기였다.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인간게놈프로젝트(Human Genome Project)가 초안 완성을 발표하면서 생명과학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유전자 분석 기술이 빠르게 발전했고, 질병 치료는 동일한 약을 모든 환자에게 적용하는 방식에서 개인의 유전적 특성을 고려하는 정밀의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글로벌 제약기업들은 신약개발 경쟁을 확대했고, 미국 보스턴과 영국 케임브리지 등 세계 주요 바이오 클러스터에는 연구개발 투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싱가포르 정부는 이러한 변화를 단순한 과학기술 발전으로 보지 않았다. 미래 국가경쟁력을 결정할 새로운 산업혁명의 시작으로 판단했다. 국토와 자원이 부족한 싱가포르가 세계 경제에서 지속적으로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존 제조업을 넘어 연구개발 중심 국가로 전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바이오메디컬 산업은 의료산업이 아니라 국가 생존전략이라는 인식이 정부 내부에서 확산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싱가포르의 연구 기반은 충분하지 않았다. 분자세포생물학연구소(IMCB)가 운영되고 있었지만 세계적인 바이오 허브를 만들기에는 연구기관과 전문인력, 국제 공동연구 네트워크가 모두 부족했다.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기업보다 먼저 연구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이를 실행할 적임자로 필립 여(Philip Yeo)가 전면에 나섰다.


필립 여는 싱가포르 경제개발청(EDB)을 이끌며 제조업과 외국인 투자를 성공적으로 유치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바이오산업 역시 기업 유치만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세계 최고의 과학자가 연구하고 싶은 환경을 먼저 만들고, 연구 성과가 기업과 투자로 이어질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그가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은 연구기관 확대였다. 정부 연구조직을 재편해 A STAR를 중심으로 생명과학 연구기관을 집중 육성했고, 유전체 연구와 바이오정보학, 줄기세포, 바이오공학 등 세부 분야별 전문 연구소를 설립했다. 단순히 연구기관의 숫자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하나의 공간에서 협력할 수 있도록 연구체계를 다시 설계했다.


필립 여는 연구시설보다 사람을 먼저 확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세계 각국의 연구자를 직접 만나 싱가포르에서 연구할 것을 제안했고, 국제학회와 대학을 찾아다니며 우수한 과학자를 영입했다. 연구자에게는 안정적인 연구비와 첨단 연구장비, 국제 공동연구 기회가 제공됐다. 해외 우수 학생에게는 장학금을 지원해 세계 명문대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뒤 다시 싱가포르 연구기관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장기 인재 육성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특히 노벨상 수상자인 시드니 브레너(Sydney Brenner)를 비롯한 세계적 석학들을 과학 자문단으로 참여시킨 것은 싱가포르 바이오 정책의 신뢰도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세계적인 연구자가 참여하면서 국제 연구자들의 관심도 자연스럽게 싱가포르로 향하기 시작했다. 연구자는 또 다른 연구자를 불러들이고, 연구성과는 다시 기업과 투자자를 끌어들이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전략은 2003년 Biopolis 개장으로 이어졌다. Biopolis는 단순한 연구단지가 아니었다. A STAR 산하 연구기관과 글로벌 제약회사 연구소, 대학, 병원, 바이오 스타트업이 한 공간에서 연구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설계된 세계적인 바이오 혁신 플랫폼이었다. 연구자는 실험실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곧바로 기업과 연결할 수 있었고, 기업은 연구기관의 전문성과 첨단 장비를 활용해 신약개발과 기술사업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오늘날 원노스에는 400개가 넘는 기업과 다수의 공공 연구기관, 대학, 글로벌 기업 연구소가 집적돼 있다. 글로벌 제약기업들은 단순히 생산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싱가포르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연구개발과 임상, 생산을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높게 평가했다. 정부는 연구개발 예산을 지속적으로 확대했고, 2006년부터 2015년까지 바이오메디컬 분야에 약 73억 싱가포르달러를 투자했다. 같은 기간 민간에서는 약 137억 싱가포르달러 규모의 투자와 연구개발이 이어졌다. 국가가 먼저 위험을 부담하고 연구 기반을 구축하자 민간투자가 뒤따르는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에도 과제는 남아 있다. 세계적인 제약기업과 연구기관이 다수 입주했지만 토종 글로벌 바이오기업은 아직 제한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높은 연구개발 비용과 글로벌 인재 확보 경쟁도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연구 성과를 사업화하고 창업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는 여전히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그럼에도 싱가포르 사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남긴다. 미래 산업은 기업 하나를 지원한다고 성장하지 않는다. 연구기관과 대학, 글로벌 인재, 민간투자, 장기적인 정부 정책이 하나의 생태계로 연결될 때 비로소 새로운 산업이 탄생한다. 필립 여가 추진한 바이오 전략의 핵심 역시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니라 연구가 산업으로 이어지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있었다.

※ Decision Point
2001년 싱가포르는 연구기관을 통합해 A*STAR를 중심으로 국가 연구개발 체계를 재편했다. 이는 연구를 학문에 머무르게 하지 않고 산업과 경제성장으로 연결하겠다는 국가 전략의 출발점이었다.

※ Timeline
1987년
분자세포생물학연구소(IMCB) 출범
2000년
바이오메디컬 산업 국가 성장전략 발표
2001년
A*STAR 중심 연구개발 체계 구축
2003년
Biopolis 1단계 개장
2006~2015년
정부 연구개발 투자 약 73억 싱가포르달러
현재
원노스는 글로벌 연구기관과 기업이 집적된 아시아 대표 바이오 혁신 클러스터로 성장


※ Key Person
필립 여(Philip Yeo)
싱가포르 경제개발청과 ASTAR를 이끌며 바이오 국가전략을 설계한 핵심 인물이다. 연구기관 확대와 해외 석학 영입, 글로벌 제약기업 유치, 인재 육성 프로그램을 동시에 추진하며 연구와 산업을 연결하는 국가 혁신 시스템을 구축했다.


※ Global Data
- 정부 바이오메디컬 투자(2006~2015년): 약 73억 싱가포르달러
- 민간 투자 및 연구개발: 약 137억 싱가포르달러
- 원노스 입주 기업: 400개 이상
- 세계 10대 바이오제약기업 다수가 연구 또는 생산거점 운영

※ 소상공인포커스 시사점
싱가포르는 기업을 기다리지 않았다. 먼저 연구자를 키우고,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환경을 만들었으며, 그 위에 기업과 자본을 연결했다. 미래 산업의 경쟁력은 공장 규모가 아니라 연구와 인재, 그리고 이를 산업으로 연결하는 생태계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소상공인포커스 / 서영현 기자 93oliv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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