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대표하는 산업 경쟁력의 또 다른 축은 '미텔슈탄트(Mittelstand)'다
독일은 어떻게 사람을 산업으로 연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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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조업 강국 독일을 만든 것은 최첨단 공장이 아니라 연구실과 현장을 연결하는 '사람'이다. 대학에서 시작된 기술이 연구소와 중소기업(미텔슈탄트)으로 흘러들어가 세계적 제품이 되는 독일의 산학협력 선순환 생태계는, 인구 감소와 인재 난에 직면한 한국 제조업이 나아가야 할 결정적 이정표를 제시한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사진=챗GPT) |
● 제조업 강국을 만든 것은 공장이 아니라 사람이다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뮌헨. 이른 아침, 뮌헨공과대학교(TUM) 캠퍼스에는 세계 각국에서 모인 학생들이 강의실보다 연구실로 먼저 향한다. 독일 학생, 인도 학생, 중국 학생, 한국 학생이 하나의 연구팀을 이루어 차세대 배터리 소재를 분석하고, 인공지능 기반 제조공정을 시뮬레이션한다. 이들에게 독일은 단순히 학위를 받는 나라가 아니다. 연구가 산업으로 이어지고, 산업이 다시 세계시장으로 연결되는 과정을 직접 배우는 현장이다.
한 국제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독일에서 배우는 것은 교과서가 아니라 산업입니다. 연구실에서 시작한 아이디어가 몇 년 뒤 공장에서 제품이 되고, 세계시장으로 나가는 과정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입니다.” 이 한마디는 독일이 세계 인재를 끌어들이는 이유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독일을 자동차와 기계산업의 나라로 기억한다. 메르세데스-벤츠와 BMW, 폭스바겐, 지멘스와 보쉬 같은 세계적인 기업들이 독일 산업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업들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니다. 그 배경에는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교육과 연구, 산학협력, 그리고 인재를 중심에 둔 국가 전략이 있었다.
세계는 흔히 독일을 제조업 강국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독일의 진정한 경쟁력은 공장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아무리 최첨단 생산시설을 갖추고 있어도 그것을 설계하고 운영하며 혁신하는 인재가 없다면 제조업은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 독일은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이해했고, 산업정책의 중심에 언제나 사람을 두었다.
독일 대학은 학생을 졸업시키는 곳이 아니라 산업을 성장시키는 출발점이다. 대학 연구실에서 시작된 기술은 프라운호퍼 연구소와 막스플랑크 연구소 같은 세계적 연구기관을 거쳐 기업으로 이전되고, 기업은 다시 대학과 공동연구를 수행하며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다. 이 순환 구조 속에서 학생은 단순한 학습자가 아니라 미래 산업을 함께 설계하는 연구자가 된다.
● 독일을 대표하는 산업 경쟁력의 또 다른 축은 '미텔슈탄트(Mittelstand)'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대기업보다 주목받지 못하지만, 독일에는 각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선도하는 수많은 중견·중소기업이 존재한다. 이들 기업은 특정 기술을 수십 년 동안 축적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확보했고, 대학과 직업교육기관, 연구소와 긴밀하게 협력하면서 전문인력을 지속적으로 양성해 왔다.
이러한 구조는 독일의 직업교육제도인 '듀얼 시스템(Dual System)'에서도 잘 드러난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이론을 배우는 동시에 기업 현장에서 실무를 경험한다. 졸업과 동시에 산업현장에 바로 투입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업은 필요한 인재를 직접 육성하고, 학생은 교육과 취업을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교육과 산업이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태계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독일이 세계 각국의 학생들에게 매력적인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다. 독일에서 배우는 것은 단순한 학문이 아니라 산업 생태계 자체다. 연구실에서 개발된 기술이 어떻게 특허가 되고, 기업으로 이전되며,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갖춘 제품으로 발전하는지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이것이 독일이 제조업 강국으로 남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이며, 세계 인재들이 독일을 선택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다.
오늘날 세계는 반도체와 인공지능, 바이오, 친환경 에너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독일은 여전히 같은 원칙을 지킨다. 기술은 사람이 만들고, 산업은 기술이 성장시키며, 국가경쟁력은 결국 사람에게서 시작된다는 믿음이다. 이 원칙은 시대가 변해도 흔들리지 않는 독일 산업의 가장 큰 자산이다.
● 독일은 어떻게 사람을 산업으로 연결하는가
독일의 인재 전략을 이해하려면 대학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대학과 연구소, 기업, 직업교육기관, 지방정부가 서로 역할을 나누면서도 하나의 산업 생태계처럼 움직이는 과정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은 어느 한 기업이나 명문대학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라, 지식이 기술로 이전되고 기술이 제품과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설계된 연결망에서 나온다.
그 중심에 프라운호퍼협회가 있다. 독일의 대학이 기초학문과 장기 연구를 담당한다면, 프라운호퍼 연구소는 대학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기술로 전환하는 역할을 맡는다. 기업이 해결해야 할 생산공정과 소재, 자동화, 에너지, 인공지능 문제를 연구기관과 함께 풀고, 연구 결과를 특허와 시제품, 생산기술로 연결한다. 연구가 논문으로 끝나지 않고 산업현장에서 활용될 때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학생과 젊은 연구자는 단순한 보조인력이 아니다. 기업이 실제로 해결해야 할 문제를 연구하고, 기술이 시장에서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지 경험한다. 대학에서 얻은 지식을 공장과 기업의 언어로 바꾸는 훈련을 받는 셈이다. 독일이 세계 인재들에게 매력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구자는 자신의 연구가 산업과 사회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 직접 확인할 수 있고, 기업은 필요한 기술과 인재를 연구단계부터 확보할 수 있다.
프라운호퍼의 강점은 연구기관이 산업과 가까이 있다는 데만 있지 않다. 연구비의 상당 부분을 기업과 공공 연구과제를 통해 확보하면서 시장이 요구하는 기술과 장기 국가전략을 동시에 추구한다. 최근에는 인공지능과 첨단제조, 에너지 전환, 양자기술, 디지털 인프라 등으로 연구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유럽 최초의 엑사스케일급 슈퍼컴퓨터를 활용하는 인공지능 공장 사업에도 프라운호퍼 기관들이 참여하고 있다. 독일은 전통 제조업의 강점을 지키는 데 머무르지 않고, 기존 제조역량을 디지털 기술과 결합하는 방향으로 인재와 연구체계를 재편하고 있다.
미텔슈탄트 역시 독일 인재 생태계에서 빼놓을 수 없다. 독일의 중견·중소기업은 규모만 작은 기업이 아니다. 특정 부품과 장비, 소재, 생산기술에서 세계시장 점유율을 확보한 기업이 많다. 이들은 대기업의 하청업체에 머무르지 않고 좁은 분야를 깊게 파고들어 세계적인 기술기업으로 성장했다. 독일 제조업의 저력은 대기업 몇 곳이 아니라 수천 개의 전문기업이 지역 곳곳에서 기술과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데 있다.
미텔슈탄트 기업의 경쟁력은 오랜 기술축적과 숙련인력에서 나온다. 한 기업이 특정 기계와 부품을 수십 년 동안 개발하면서 경험을 쌓고, 그 경험이 다시 다음 세대의 기술자에게 전달된다. 단기간의 비용 절감을 위해 생산을 모두 외부로 이전하기보다 핵심기술과 숙련인력을 지역 안에 남겨두는 기업문화가 강하다. 학생은 지역 학교와 직업교육기관에서 기술을 배우고, 기업은 학생을 장기간 훈련하며, 지방정부와 금융기관은 기업이 지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원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독일의 듀얼 직업교육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학생은 교육기관에서 이론을 배우면서 일정 기간 기업현장에서 실제 업무를 수행한다. 기업은 단순히 완성된 인재를 채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인력을 교육과정부터 함께 육성한다. 학생 입장에서는 교육이 취업과 단절되지 않고, 기업 입장에서는 현장을 이해하는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독일의 직업교육을 단순히 기술자를 길러내는 제도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 품질과 안전에 대한 책임, 공정 전체를 이해하는 태도를 함께 가르치는 산업문화에 가깝다. 대학을 나오지 않더라도 숙련기술자와 마이스터로 성장할 수 있고, 다시 후배를 교육하거나 기업을 창업할 수 있다. 학력과 직업의 위계보다 각자의 전문성을 산업 안에서 축적할 수 있도록 여러 경로를 열어두는 것이 독일 모델의 강점이다.
세계적인 자동차와 기계, 화학기업이 존재하는 것만으로 제조업 생태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연구개발을 담당하는 과학자, 생산라인을 설계하는 엔지니어, 공정을 관리하는 기술자, 정밀부품을 만드는 숙련인력, 국제시장과 금융을 이해하는 경영자가 함께 성장해야 한다. 독일은 이 인력들을 서로 분리하지 않고 산업 안에서 연결해 왔다.
이 연결망은 국제학생에게도 열려 있다. 독일 대학의 외국인 학생은 빠르게 늘고 있다. 독일 연방통계청에 따르면 2024학년도 외국인 신입생은 14만5천100명으로 전년보다 10% 증가했다. 전체 신입생의 약 30%가 외국인이었고, 10년 전 22%보다 크게 높아졌다. 특히 공학 분야의 외국인 신입생은 12%, 수학·자연과학은 14% 증가했다. 2024·2025년 겨울학기 독일 대학의 외국인 학생은 49만2천600명으로 전년보다 5% 늘었다. 독일의 자국 학생 수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대학의 성장과 이공계 인재 공급을 국제학생이 상당 부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숫자는 독일이 국제학생을 대학의 부수적인 국제화 지표로 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독일의 젊은 인구와 자국 대학 진학 가능 인구가 감소하는 가운데 외국인 학생은 대학과 연구소, 산업현장을 유지하는 중요한 인적 기반이 되고 있다. 독일의 고등교육 졸업자 가운데 이공계 전공 비중은 2024년 34%로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가장 높았다. 국제학생 비중도 2016년 8%에서 2023년 13%로 상승해 같은 해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8%를 크게 웃돌았다. 독일의 인재 유치가 단순한 숫자 확대가 아니라 이공계와 산업인력 확보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독일이 국제학생을 끌어들이는 또 다른 힘은 선택 가능한 교육과정이다. 독일학술교류처의 2025·2026년 국제과정 목록에는 2천500개가 넘는 프로그램이 등록돼 있으며, 이 가운데 영어로만 진행되는 과정이 2천 개를 넘는다. 공학 분야와 수학·자연과학 과정도 폭넓게 개설돼 있다. 독일어를 완전히 익히기 전에도 국제학생이 연구와 산업 분야에 진입할 수 있도록 교육 진입장벽을 낮춘 것이다.
그러나 독일 모델을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독일도 숙련인력 부족과 인구 고령화, 행정절차, 언어 장벽, 주거난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국제학생이 대학에 입학하는 것과 졸업 후 독일 산업에 정착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기업이 요구하는 독일어 능력과 현장경험을 갖추지 못하면 취업으로 연결되기 어렵고, 중소도시와 지방기업은 세계 인재를 끌어들이는 데 대도시보다 불리하다.
독일이 주목받는 이유는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다. 문제가 발생할 때 교육과 산업, 이민정책을 함께 조정하려 한다는 데 있다. 국제학생을 유치한 뒤 대학에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기업 인턴십과 연구 프로젝트, 취업과 체류제도를 연결해 산업인력으로 성장시킬 가능성을 열어둔다. 외국인 신입생 증가가 독일 학생 감소를 보완하고 있는 현실은 국제인재가 이미 독일 산업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조건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독일의 경험은 대한민국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한국도 세계적인 대학과 연구소, 대기업과 중소기업, 우수한 제조기반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대학에서 배출된 인재가 기업과 연구소, 지역 중소기업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여전히 매끄럽지 않다. 대학은 논문과 학위에 집중하고, 기업은 즉시 활용할 수 있는 경력자를 찾으며, 학생은 기업이 어떤 기술을 요구하는지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취업시장에 진입한다.
특히 중소기업은 필요한 기술인력을 구하지 못하고 있지만, 외국인 유학생과 연결되는 통로는 제한적이다. 반도체와 이차전지, 인공지능, 바이오 분야에서 공부한 국제학생이 있어도 비자와 언어, 기업정보 부족으로 자신의 전공과 무관한 일을 선택하거나 졸업 후 한국을 떠나는 경우가 생긴다. 한국은 유학생을 늘리는 정책과 산업인력을 확보하는 정책을 별도로 추진해 왔다. 독일이 보여주는 가장 큰 교훈은 두 정책이 분리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이 독일 모델을 그대로 복제할 수는 없다. 독일의 미텔슈탄트와 직업교육은 오랜 역사와 지역기업문화 위에서 형성됐다. 그러나 원리는 배울 수 있다. 첫째, 대학의 연구를 기업의 문제와 연결해야 한다. 둘째, 학생이 졸업 전에 현장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산학협력을 일상화해야 한다. 셋째, 중소기업도 인재를 소비하는 곳이 아니라 직접 키우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넷째, 국제학생을 대학의 등록금 수입이 아니라 산업과 지역을 함께 살릴 인재로 바라봐야 한다.
대학과 기업이 공동으로 국제학생의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학생이 연구실과 기업을 오가며 기술을 익히며, 졸업 후에는 한국 기업이나 본국의 현지법인에서 경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에서 성장한 독일·유럽·아시아 학생이 귀국한 뒤에도 한국 기업과 연구기관의 협력자로 활동한다면, 그 관계는 취업을 넘어 연구와 투자, 수출로 이어질 수 있다.
독일 제조업의 경쟁력은 공장의 크기에서 나오지 않았다. 대학에서 시작된 지식이 연구소를 거쳐 기술이 되고, 기업에서 제품으로 성장하며, 숙련인력이 그 품질을 지켜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이 과정에 국제학생과 외국인 연구자가 합류하면서 독일은 인구감소 속에서도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독일에서 배워야 할 것은 자동차나 기계기술만이 아니다. 사람을 교육하고, 그 사람을 연구와 기업에 연결하며, 다시 다음 세대의 인재를 키우게 하는 순환의 원리다. 좋은 대학이 있다고 좋은 산업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좋은 기업이 있다고 인재가 저절로 모이는 것도 아니다. 대학과 연구소, 기업과 지역사회가 한 사람의 성장을 함께 책임질 때 비로소 지식은 산업이 된다.
독일은 공장을 먼저 세우고 사람을 찾지 않았다. 사람을 길러냈기 때문에 공장이 성장했고, 기술이 축적됐으며, 세계시장을 이끄는 기업이 탄생했다.
● 사람이 움직이면 지식이 이동한다
지식은 연구를 통해 기술이 되고, 기술은 숙련과 결합해 산업이 된다. 산업은 자본과 무역을 끌어들이고, 다시 새로운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독일 제조업의 진정한 경쟁력은 바로 이 순환을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소상공인포커스 / 서영현 기자 93oliv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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