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취재] R&D 지원만으로는 시장을 만들 수 없는 이유

김경훈 대기자 / 기사승인 : 2025-09-04 1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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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중심 사고가 만든 산업 정책의 한계
▲ 한국 산업 정책은 오랫동안 연구개발(R&D) 투자를 혁신의 절대적 지표로 삼아왔으나, 축적된 기술력이 개별 기업의 브랜드 파워나 독립적인 시장 결정권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성과 체증의 한계'에 직면해 있다. 사진은 기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이미지.(사진=한국산업기술진흥원 블로그 갈무리)

 

 

한국 산업 정책을 설명하는 문서나 정책 보고서를 살펴보면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연구개발이다.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 가운데 상당수는 연구개발 투자 확대와 기술 혁신 지원을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실제로 정부 예산에서도 연구개발 관련 항목은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기술 경쟁력이 산업 경쟁력의 핵심이라는 인식은 오래전부터 자리 잡아 왔고 많은 정책 역시 이 인식을 기반으로 추진되어 왔다. 이러한 정책이 한국 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산업 구조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연구개발 투자 확대만으로 산업 경쟁력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기술 개발이 곧바로 시장 경쟁력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제조업은 이미 상당히 높은 기술 수준을 가진 산업이다. 반도체, 자동차, 배터리, 전자 산업 등 여러 분야에서 한국 기업들은 세계 시장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쟁력은 장기간의 연구개발 투자와 기술 축적의 결과다. 그러나 산업 생태계 전체를 보면 이러한 기술 경쟁력이 모든 기업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 중소 제조기업의 경우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독립적인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한국의 많은 중소 제조기업은 특정 산업의 공급망 안에서 생산 활동을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산업 장비 산업이나 기계 부품 산업에서는 높은 기술 수준을 가진 기업이 많지만 이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독립적인 브랜드 기업으로 성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기업이 특정 산업이나 특정 기업의 공급망에 포함된 상태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은 기술을 개발하고 생산 능력을 축적하지만 시장 가격을 설계하는 위치에는 서지 못한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연구개발 투자가 기업의 시장 지배력 확대와 연결되기 어렵다.


휘트니스 장비 산업은 이러한 문제를 비교적 명확하게 보여 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다. 헬스클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러닝머신이나 웨이트 장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특정 브랜드의 제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나라의 제조기업이 생산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글로벌 시장에서 알려진 브랜드 가운데 상당수는 제품 설계와 유통망을 중심으로 운영되며 실제 생산은 다양한 제조 기업이 맡는다. 한국에도 운동기구를 생산하는 중소 제조기업이 존재하며 일부 기업은 해외 시장으로 제품을 공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많은 기업이 여전히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주문자상표부착생산) 방식에 의존하고 있으며 독자적인 브랜드를 기반으로 시장을 운영하는 기업은 많지 않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기업 전략의 문제로만 설명하기 어렵다. 산업 정책의 설계 방식 역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많은 정책이 기술 개발 단계에 집중되어 있으며 기술 이후의 시장 전략이나 산업 구조 변화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기업은 연구개발 지원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확보하지만 그 기술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과정은 대부분 기업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남는다. 결국 기술 경쟁력은 확보되지만 시장 경쟁력은 제한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대만 제조업은 이러한 구조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 온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대만 역시 중소기업 중심 산업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연구개발 정책이 산업 전략과 연결되는 방식에서 한국과 차이가 있다. 대만에는 ITRI(Industrial Technology Research Institute, 산업기술연구원)라는 대표적인 연구 기관이 존재하는데 이 기관은 단순히 기술을 개발하는 연구소가 아니라 기술이 산업으로 이전되는 과정까지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연구개발 결과가 기업으로 이전되고 산업 생태계로 확산되는 구조가 제도적으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대만 휘트니스 장비 산업에서도 이러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Johnson Health Tech(존슨헬스테크)는 세계적인 휘트니스 장비 기업 가운데 하나로 Matrix(매트릭스)와 Horizon(호라이즌) 같은 브랜드를 통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이 기업은 처음부터 글로벌 브랜드로 출발한 것이 아니라 OEM 생산을 통해 산업 경험을 축적한 뒤 점차 제품 설계와 브랜드 전략을 강화하면서 시장 지배력을 확대해 왔다. 중요한 점은 기술 개발과 시장 전략이 동시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단순히 기술을 확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산업 네트워크와 유통망을 함께 구축하면서 시장 구조 안에서 기업의 역할을 확대해 왔다.


한국 산업 정책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 역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연구개발 투자는 여전히 중요하다. 기술 혁신이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핵심 요소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술 개발이 곧바로 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개발한 기술이 어떤 산업 구조 속에서 활용되는지, 그리고 그 기술이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데 어떻게 사용되는지가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산업 경쟁력은 공장 안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술 개발과 시장 전략이 서로 연결될 때 비로소 산업 경쟁력이 형성된다. 연구개발 정책이 산업 전략과 분리된 상태로 운영된다면 기술은 축적될 수 있지만 산업 구조 자체는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한국 산업 정책이 다음 단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기술 개발과 시장 전략을 동시에 설계하는 정책 구조가 필요하다. 기술은 산업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만 산업의 방향을 결정하는 요소는 결국 시장이기 때문이다.

 

 정보 코너

R&D (Research and Development, 연구개발)
새로운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기 위한 연구 활동을 의미하며 기업 경쟁력의 중요한 기반이 된다.
ITRI (Industrial Technology Research Institute, 산업기술연구원)
대만의 대표적인 산업 기술 연구 기관으로 기술 개발뿐 아니라 기술 이전과 산업 확산을 동시에 담당하는 조직이다.
OEM (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 주문자상표부착생산)
제조 기업이 다른 기업의 브랜드 제품을 대신 생산하는 방식으로 글로벌 제조 산업에서 널리 사용되는 구조다.

 

 

소상공인포커스 / 김경훈 대기자 kkh4290@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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